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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 영화를 만나다

최초의 영화로 알려져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6)>
이미지는 현실과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습니다. 동굴벽화에서부터 원근법을 활용한 회화 그림, 현실의 장면을 이미지로 담아내는 사진의 등장, 움직이는 이미지인 시네마의 등장까지. 이후 영화는 무성영화부터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컬러로 진화했습니다. 이뿐일까요? 사람들은 가상의 이야기를 더욱 현실감 있게 즐기며 몰입하고 싶어합니다. 곧이어 3D 영화, 4D 영화가 등장했고, 이제는 IMAX 영화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VR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가히 혁신적입니다.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상영되었을 때,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스크린으로부터 도망쳤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장소를 눈앞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는 점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VR의 등장 또한 영화 매체의 첫 등장만큼이나 충격적입니다. 관람객과 영상 콘텐츠 사이의 시공간적 장벽을 사라지게 하는 놀라운 혁신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pixabay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예술 콘텐츠에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콘텐츠들은 매체에 맞추어 그 형태를 변화시키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예술형식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기존 회화를 표방한 방식의 회화주의 사진에서 시작했던 초기 사진이 점차 사진만의 고유한 표현 방식을 추구하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죠. 단순히 움직이는 이미지에 불과했던 초기 영화 또한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인정받는 오늘날의 영화가 되기까지 다양한 시도를 거쳐왔습니다. 기존 문학이나 극을 영화로 옮겨오려는 시도에서부터 시작해, 영화 고유의 특성을 살리고자 하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영화만의 독특한 서사 구조와 미학들을 발전시키게 되었죠. 분명 각각 매체의 고유한 특성에 맞는 예술형식이 존재하고, 현재의 VR 영화 역시 이러한 과정을 겪어나가는 중입니다. VR을 예술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VR이 지닌 매체의 성격을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VR 영화는 분명 다르다

VR은 기존 영화 매체와는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VR 영화는 제작 방식, 기획 방식, 내러티브 구조 등 여러 측면에서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죠. 그렇다면, VR이라는 매체를 영화에 접목시켰을 때 가장 크게 변화되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출처: CGV
프레임의 부재
VR 영화의 가장 큰 특이점을 꼽자면, 단연 프레임의 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사각 스크린 기반의 영화는 감독의 프레이밍을 통해 내용 전개상 필수적인 부분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스토리를 전개해갑니다. 하지만 VR 영화에서 관객은 고개를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돌려가며 영화 속 360도 공간을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프레임이 사라지면서 샷의 크기나 촬영기법 등 영화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시각언어들은 무력해집니다. 무엇을 봐야 하는지, 무엇을 강조시킬 수 있는지 애매모호해지는 것이죠. 배우의 얼굴이나 행동을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면, 스토리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들을 놓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영화 제작자들은 VR 영화는 오히려 연극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프레임이 없기 때문에 컷 편집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기존 영화 제작에 있어 컷 편집은 필수적이지만, VR 영화의 360도 스크린에서 기존의 방식대로 컷을 전환시킨다면 큰 이질감을 발생시킬 겁니다. 결국 관람객을 몰입에서 깨트리게 될 것이구요. 컷 편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VR 영화감독들은 새로운 기술과 도구들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습니다. 두 샷 사이의 움직임이나 조명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일치시키거나, 관람객의 시선을 한 방향으로 유도하면서 공간의 전환을 만드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죠.
출처: META, NETFLIX
관객과 콘텐츠 간의 관계의 변화
기존 영화에서 관람객은 영화를 관람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지 않습니다. 감독이 만들어 둔 샷의 흐름에 따라 영화 속 주인공의 사건에 깊이 몰입하게 될 뿐이죠. 하지만 VR 영화에서 관람객은 감독의 지시에서 벗어나, 보다 능동적으로 영화를 관람하게 됩니다. 관람객은 영화 속 공간에 주인공과 함께 존재합니다. 스토리의 외부에서 내부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스토리 내부로 들어와 그 일부로 편입되는 것입니다. 관람객은 그 안에서 원하는 부분을 오랜 시간 바라보거나, 방향을 틀어 다른 곳을 둘러보거나, 사물을 만져보고자 손을 뻗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람 방식은 관람객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인식하게 만듭니다. 이는 단순히 몰입감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관람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동적인 몰입에서 능동적인 몰입으로의 전환인 것이죠.
능동적인 관람 방식은 전체적인 영화 서사의 리듬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만일 관람객이 영화 속 공간과 상황에 대한 탐색을 마치기 전에 다음 스토리로 넘어가게 된다면, 서사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거나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VR 영화에서는 기존 영화의 서사 리듬보다 느린 속도로 흘러가거나, 공간을 자주 옮기지 않기 위해 하나의 공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서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VR 애니메이션 <헨리>는 모든 네러티브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특히 도입 부분에서 관람자가 공간을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을 40초 정도 부여합니다.
앞서 언급한 프레임의 부재와 능동적인 관람 방식은 전통적 영화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꿔놓습니다. 관객이 전통적 영화보다 훨씬 더 많은 제어권을 가지는 VR 영화 콘텐츠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일은, 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영화는 영상매체를 활용하여 감독의 시점으로 구성된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분야입니다. VR 영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VR 영화에서는 관람자가 직접 시선을 돌려 공간을 살펴보고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람 방식에서 감독의 의도가 어떻게 잘 전달될 수 있을지, 또 기존 영화의 선형적인 스토리텔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영화는 "샷(shot)"이라 불리는 장면의 최소 단위로 구성되며, 감독은 각 샷을 의도적으로 특정 각도와 프레임에서 촬영하여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런 전통적인 방식에서는 감독이나 작가가 시각적으로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조작하느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VR 영화에서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샷’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VR 영화에서 감독은 작품의 내용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샷을 통해 필요한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배치하면서 관람자가 어떤 시점에서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VR 영화는 공간 예술적인 측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출처: 베니스 영화제

VR 영화, 어디까지 왔는가?

그렇다면 VR 영화, 도대체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요? VR 기술에 관심이 집중되던 2010년대 중후반 이후로 VR 영화에도 큰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후 많은 창작자들과 스튜디오들이 VR 영화 창작에 주목하게 되면서 여러 VR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가 제작되었죠. 그리고 2017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는 XR 경쟁 부문인 베니스 이머시브(Venice Immersive)를 신설했습니다. 작년 제 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는 25개국의 43개의 작품이 상영되었으며, 총 3편의 한국 VR 작품이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올해 77회 칸 영화제에서도 몰입형 작품 경쟁 부문인 ‘Immersive Competition’을 따로 신설하여 8편의 XR 작품들을 상영했습니다. 이외에도 트라이베카 영화제, 선댄스영화제 등 여러 메이저 영화제에서 적극적으로 VR/XR 영화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 유명 영화제들이 잇따라 VR을 위한 경쟁 부문을 신설하면서 VR 영화가 본격적으로 영화로서의 영역에 편입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출처: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국내 영화제 중에서는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다양한 VR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는 2016년 VR 부문 프로그램인 ‘비욘드 리얼리티’를 따로 신설하여 국내외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던 XR 영화들을 상영하며, XR 분야의 현황 및 이슈를 살펴보는 아티스트 토크 등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내 VR 영화의 제작을 독려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노력들도 여럿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22년 4월 ‘실감 콘텐츠 활성화를 위한 VR 영화 지원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는 매년 VR 영화제작 교육 입문 과정을 진행하며 VR 영화 분야의 발전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영화 <헨리> 속 헨리의 외로운 생일파티 장면, 출처: META
VR 영화의 매력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VR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소개해드릴 작품은 오큘러스 산하의 오큘러스 스토리 스튜디오에서 두번째로 제작한 VR 영화인 <헨리>입니다. 에미상을 수상한 최초의 VR 작품으로, 8분 정도 길이의 귀여운 애니메이션입니다. 친구를 간절히 원하지만, 날카로운 가시로 모두를 멀리 피하게 한 아기 고슴도치인 헨리가 생일을 맞이하며 생일 소원을 빌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러닝타임이 그리 길지 않고 스토리도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진행되지만, VR 영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현재 오큘러스 스토어를 통해 무료로 배포되고 있습니다.
출처: META
다음으로 소개해드릴 작품은 <디어 안젤리카>입니다. <헨리>의 제작사와 같은 오큘러스 스토리 스튜디오에서 세번째로 제작한 VR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12분 정도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의 꿈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며, 오큘러스에서 개발한 VR 드로잉 툴인 ‘Quill’을 활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관람객을 중심으로 2D와 3D를 넘나들며 장면을 드로잉해가는 듯한 전개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디어 안젤리카> 또한 <헨리>와 마찬가지로 현재 오큘러스 스토어를 통해 무료로 배포되고 있습니다.

VR 영화에 ‘몰입’하다

기존의 영화 매체와 비교했을 때 VR이라는 매체의 가장 큰 특성은 몰입감, 즉 ‘프레즌스(prese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즌스’는 현실을 넘어 콘텐츠 속에 자신이 존재하는 느낌으로 콘텐츠에 몰입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몰입이라는 부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에 몰입한다는 것은 단순 매체 특성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는 잘 만들어져 있는 2D 영화를 볼 때도 이미 충분히 몰입하고 있다고 느끼니까요. 반대로 VR 영화라고 해서 모두 엄청난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순히 그 공간 안에 머무른다고 해서 공간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에 몰입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장치가 없다면, 관람자가 능동적으로 관람하게 되는 과정에서 서사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놓치거나, 집중이 산만해져서 오히려 내용에 대한 몰입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영화에 몰입해 빠져든다는 것은 단순히 매체가 만들어주는 효과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관람자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VR이 몰입에 특화되어 있는 매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VR이 잘할 수 있는 몰입이라는 부분을 더 이끌어내 줄 수 있는 영화적 구성과 방식이 필요합니다. 이는 많은 VR 영화 감독들이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죠. VR 영화의 네러티브 방식에 집중해 시각적 단서를 던져두고 관람자들이 능동적으로 서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하고, 시각 요소들을 통해 한 부분에 시선을 유도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기존 VR 영화에 인터렉티브 요소가 추가된 인터렉티브 VR 영화입니다.
(<Wolves in the Walls>의 한 장면, 출처 : META)
인터랙티브 VR 영화는 관람객이 직접 영화의 구성 요소가 되어 영화 속 다른 구성요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플롯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형태의 VR 영화입니다. 최근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던 작품 중 다수가 인터랙티브 VR 영화인만큼, VR 영화의 흐름은 점차 인터랙션 요소가 포함된 작품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대표적인 인터렉티브 VR 작품으로 <Wolves in the Walls>를 소개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Wolves in the Walls>는 오큘러스의 스타트업 페이블 스튜디오에서 만든 인터렉티브 VR 영화로, 에미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작품은 주인공 Lucy가 집 벽에서 늑대 소리를 듣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내용의 <The Wolves in the Walls>라는 원작 동화책의 내용을 배경으로 합니다. 관람객은 주인공 Lucy와 직접 상호작용하며 스토리를 전개시켜 나가며, 이러한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해 몰입을 극대화시킵니다.

마치며 : VR 영화의 미래는?

사실 VR 영화의 개념이 등장한 지는 꽤 되었지만, 현실에서 체감할 만한 수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VR 영화만의 시각언어나 영화 문법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수 VR 카메라의 배급 문제, 360도 영상 편집 과정에서의 복잡함과 같은 기술적 한계나 제작 비용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죠. 현재 VR 영화는 실험적인 단계를 겪는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VR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들이 존재하고, 그 결과물들 덕분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인터렉션 요소가 접목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VR 영화에 대해 영화가 아닌 새로운 콘텐츠의 영역으로 분리시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VR 영화는 단순히 영화 제작 프로세스뿐 아니라 네러티브의 전개 방식, 더 나아가 관람자들의 경험 방식마저 뒤흔들고 있기 때문인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과연 VR 영화는 4D 영화처럼, 몰입감을 높이기 위한 영화의 하위장르가 되거나 영화에 완전히 편입되어 영화산업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혹은, 새로운 스토리텔링 장르를 개척해 나갈 또 다른 영역이 될까요? 어떤 방향에서든 서사가 담긴 VR 컨텐츠가 영화 예술 콘텐츠 산업에 일으킬 새로운 변화를 기대해보며, 글을 마칩니다.
[작성자: XREAL 전은정]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