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대학에서 전공 폐지 수순을 밟으며 시작된, 인문학의 외면 (출처: 어크로스 출판사)
최근 여러 대학에서 인문계열 학과를 폐지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 대학 관계자는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학교가 장기적으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한 취지”라고 밝혔습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들을 양성하지 못하고 있는 인문계열 학과에 대한 무용론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주는 위기감조차 없어진 요즘입니다. 디지털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 도래한 오늘날, 산업적 수요와 비례하는 대중의 관심도로 인해 인문학은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 밖 낡은 이야기로 전락했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이 당면한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시대에 흐름에 발맞춰 인문학적 자산과 기술의 결합을 통한 조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 아티클에서는 ‘실효성 없고 고리타분하다’는 인문학에 대한 비관적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인문 분야 안에서 '메타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도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철학과 메타버스의 만남, 성학십도 VR
‘성학십도 VR' 시연회의 포스터 (출처: 내일신문)
첫 번째로 소개드릴 프로젝트는 ‘성학십도 VR’입니다. ‘성학십도 VR’은 조선시대의 유가 철학자 퇴계 이황이 책과 병풍으로 남긴 ‘성학십도’ 10개의 그림과 글에 VR 기술을 접목해 재해석한 미디어아트 작품으로, 연세대 융합연구팀에서 제작되어 2019년 첫 시연을 선보였습니다.
철학과 VR의 만남을 최초로 시도한 이 ‘성학십도 VR’은, ‘동양 철학 개념의 체험적 시공간화’라는 슬로건 하에 관람자들이 가상 현실을 통해 한국 철학의 지혜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동양철학, 그 중 한국 사상이 깊이 탐구해놓은 우주론적 존재론과 지구생태적 철학 세계를 VR 공간에 재현해둠으로써 관념과 사유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게 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성학십도 VR’의 메인페이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현재 성학십도의 1도에서 10도까지 제작된 각각의 VR 작품은, 도마다 약 7분에서 23분의 러닝타임을 가지며, 이들 전체를 감상하려면 총 130여분, 즉 장편 영화 한편을 관람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학십도 VR’의 관람자들은 특히 가상공간들 사이의 유연한 이동성에 감탄했다는 평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연구팀이 개별적으로 구성된 각 VR 콘텐츠를 정교하고 함축적인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통해 연결시키는 작업을 수행한 노력이 빛을 발한 것입니다.
‘성학십도 VR’ 작품은 당초 한국어 기반의 VR 콘텐츠로 만들어졌으나, 이후 영문 콘텐츠로도 추가 제작되어 외국 연구자와 관객에게도 한국의 전통문화와 정신세계, ‘K-철학’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에 앞장선 바 있습니다. 또한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 안에서는 현대인들이 주목하는 마음챙김의 메시지 역시 발견할 수 있기에, 실감영상 기술, 즉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한 현대적 재현의 시도로서 큰 의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성학십도 VR’의 각 도를 시연한 영상은 아래 유튜브 링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학과 메타버스의 만남, 최원재 프로젝트
송남잡지 메타버스 구축 학술세미나에서 최원재 교수 (출처: 세계뉴스통신)
두 번째로 소개드릴 프로젝트는 ‘최원재 프로젝트’입니다. ‘최원재 프로젝트’는 동국대학교 사학과 최원재 교수가 진행해온 메타버스 공간 안에서의 사료 재현 프로젝트로, 역사적 장소•기록•유물 등을 3D 모델링 기술을 활용해 현대인들이 자연스럽게 역사를 느껴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둡니다.
‘최원재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메타버스에서의 ‘송남잡지(조선 후기의 학자 송남 조재삼이 편찬한 조선 대백과사전)’와 ‘모닝캄(개화기 한국의 모습이 담긴 대한 성공회의 선교 잡지)’의 재현 등이 있으며, 최원재 교수는 자신의 작업을 ‘고고학과 사학의 중간 단계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최원재 교수는 사학과 교수로서 사료의 3D 모델링 방법을 강의하는 ‘3D 타임머신’, ‘디지털 큐레이션’ 수업 역시 진행하고 있으며, 인문계열의 교육으로서는 혁신적인 시도를 통해 학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최원재 교수와 직접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2024년 5월 30일, 동국대학교 강의실에서 최원재 교수
: 교수님,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최원재입니다. 저는 3D 모델링을 가르치고, 데이터베이스도 가르칩니다. 크게 그 두 가지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기술적으로 가르치는 것뿐만이 아니고, 콘텐츠가 될 수 있는 재료들, 다시 말하면 인문학적 소양을 같이 증진시킬 수 있는 커리큘럼을 개발해서 직접 가르치고 있습니다.
: 교수님께서 사학과에서 수업을 하고 계신데, ‘사학’과 ‘3D 모델링’을 결합하는 작업이 인문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듣고 싶습니다.
: 인문학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혁신적이죠. 인문학적으로는 문과와 이과를 통합할 수 있는 재료를 만들 수 있다는 것, 거기에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또 하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저는 전공이 교육학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문과와 이과의) 두 가지를 통합해서, 흔히 말하는 융합 교육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3D 모델링을 통해) 그것에 대한 실마리 겸 결과물을 얻게 된 거죠.
: 교육학을 전공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3D 모델링 작업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 계기는 개인적인 절박함 때문이었어요. 교육학의 수명에 대해 고민했죠. 15년 후에는, 내가 15년 전에 배웠던 걸로 누군가를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고, 분명히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에 나도 준비해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내가 뭘 할 수 있지?’ 저도 굉장히 많은 걸 배웠었어요. 컴퓨터 언어도 3개를 배웠고, 데이터베이스를 배우기도 했고, 웹 프로그래밍을 배우기도 했고. 디지털 분야에서 여러 개를 배웠는데, 나하고 딱 맞게 떨어진 녀석이 3D 모델링이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역사를 좋아하니까, 대부분 제 콘텐츠는 역사로부터 나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전에 배우던 역사는 약간 밋밋해요. 왜 그런가 하면, 손에 잡히는 뭔가가 없어요. 형체가 없어요. 계속 말만 왔다 갔다 한단 말이죠. 그런데 역사적인 것을 배울 때 가장 강조해야 하는 부분 중 하나가 ‘사람들의 이해도의 확산’이에요. 역사적인 것을 통해 이해를 많이 해보고, 그것을 오늘날에 다시 한 번 반추해보고, 그런 일종의 ‘역사학의 과정’의 체험을 (3D 모델링을 통해) 직접 해볼 수 있던 거예요. 제가 3D 모델링으로 뭔가를 만들다 보니까, ‘나 스스로가 역사를 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그때 받은 강렬한 혁신성, 타격성, 그리고 교육적인 효과를 저 스스로 실감했어요.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가르쳐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 3D 모델링을 활용한 사학 교육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 사실 (사학뿐만이 아니라) 다른 과목, 전공에서도 얼마든지 이것(3D 모델링)을 활용할 수 있어요. 활용하는 방법만 조금 변형을 주면 되는데, 지금은 너무 익숙하게만 가르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익숙하게만 가르치다 보니까, 학생들의 창의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계기가 없어요.
제가 사용하는 툴은 블렌더인데, 3D 모델링 소프트웨어죠. 이 툴의 장점은 무료라는 점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쓸 수 있죠. 그리고 이것을 커리큘럼에 녹여낼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전문적인 개발자를 양성하고자 하는 게 아니고, 그러려면 따로 더 배워야겠지만, (블렌더가) 전공 과목에서 쓰는 하나의 칠판이자 분필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걸 이용하면 문학 하는 사람들, 철학 하는 사람들, 역사 하는 사람들은 아마 상당히 큰 매력을 느끼게 될 거예요. 손에 잡히는 공부를 하게 되는 거죠.
‘3D 타임머신’ 수업에서 블렌더를 활용하여 재현한 원위각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3D 타임머신’ 수업에서 블렌더를 활용하여 재현한 대장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인문계열 학생들이 메타버스 공간 안에 어떤 것을 재현하는 걸 돕고 계신가요?
: 기본적으로 저는 (학생들이) landscape를 잘 만들길 바라요. 예를 들면, 신립장군에 대한 평가가 역사적으로 썩 좋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 신립장군이 쌓았었던 탄금대라는 곳을 한 번 보면, (신립장군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낄 수가 있어요.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거죠. 그러면서 역사적인 이해도가 점점 늘어가는 거고요.
그런데 우리는 탄금대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지형조차 몰라요. 그러면서 ‘이 사람(신립장군)은 멍청한 짓을 했구나, 어리석은 장수였구나’ 이렇게 매도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비판이 직접 깨닫고 알게 돼서 제기하는 건지, 아니면 누구나 그렇게 말하니까 군중 심리에 휩싸여서 얘기하는 건지가 불분명해요. 적어도 내가 그 당시를 (메타버스 공간에서라도) 조망을 해보고, ‘그 당시 사람이라면 이럴 수 있었겠구나’ 하는 이해도의 확산을 좀 꾀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형(의 재현)을 많이 가르쳐요.
: 지형을 알면 역사적인 인사이트가 확실히 넓어진다는 거네요. 그리고 그걸 메타버스를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게 인상 깊습니다. 수업을 듣고 인문계열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 반응이 참 좋았어요. 지루하고 고루한 수업이 아니었다고 해요.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을 한 번 끄집어내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과, (그에 더해서) 기술적인 것을 경험해봤다는 데에서 일거양득이었다는 말을 많이 해요.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못하니까) 그냥 무조건 책만 읽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실제 지형을 내가 가본 것처럼 느낄 수 있잖아요. 내가 역사를 추측하고, 실제로 느껴보고, 만져보고 하다 보니 스스로도 좀 놀라울 정도로 이해도가 커졌다고들 해요.
: 앞으로 또 어떤 것들을 메타버스 공간 안에 구현해보고 싶은지, 향후 계획이 있으신가요?
: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고 태평양까지 넓혀보고 싶어요. 태평양 군도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예전처럼 텍스트로만 바라보는 게 아니고, 진짜 피지 같은 섬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도 만들어보기도 하다 보면 우리 역사의 시각 바깥에 있었던 것들을 찾아내게 될 것 같아요. 지금은 환태평양 지역의 사료를 한 번 구현해보고 싶어요.
: 마지막 질문입니다. 역사학을 포함해서, 인문학에 메타버스를 접목하려는 시도가 앞으로 어떤 미래를 불러올 수 있을지에 대한 교수님의 전망을 여쭙고 싶습니다.
: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기자재와 교실은 완전히 바뀔 거예요. 특히 LG에서 완전히 투명한 스크린이 나왔는데, 그 투명한 스크린 안에 어떤 것들이 시각화되어질지 기대되지 않나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화이트보드나 블랙보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죠. 이후에 사람들은 전부 이런 환경에서 살고, 또 공부하게 될 겁니다. 지금이야 학생들이 종이에 해오는 숙제가 숙제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머지 않아 모든 숙제가 파일화되는 때가 곧 온단 말이죠. 예를 들어 임진왜란을 알고 싶다 하면, 임진왜란에서 사용되었던 병기나 어떤 것들을 (메타버스 공간 안에) 만들어오게 하는 숙제도 있을 수 있겠죠. 디지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교육 환경에서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겁니다. 저는 (학생들이) 그런 시대를 준비하게 해주고 싶어요.
: 메타버스가 역사의 현장을 전승하는 새로운 저장고로 활용될 수 있고, 또 실제로도 활용되고 있군요. 그런 혁신을 시작한 사람 중 한 분으로서 교수님의 자부심도 느껴집니다.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인문학의 새로운 ‘저장고’로서의 메타버스
인류의 진보에 큰 영향을 끼쳐오며 전승되어 온 인문학은, 이제 새로운 저장고가 필요한 시점을 맞았다 (출처: 어크로스 출판사)
인간은 동물 중에 유일하게 ‘문화’를 만들어 후세로 전달한 종이며, 이 과정에서 인문학이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해왔음은 자명합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부패한 왕에 의해 고통받던 백성들에게 맹자의 성선설이 왕을 규탄할 용기를 주었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염원하는 여러 문인들의 시를 통해 해방을 향한 의지를 다질 힘을 얻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전승된 인문학은 현대 문화와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줍니다.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 철학은 위안을 줄 수 있을 테고, 역사를 공부하면 과거를 오답노트 삼아 현재에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문화를 현재에도, 미래에도 늘 기억하고 꺼내볼 수 있도록 하는 저장고가 필요합니다.
마틴 푸크너(Martin Puchner) 하버드대 교수는 “문화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문화는 DNA처럼 다음 세대로 자동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저장하거나 전달해야 하며, 저장 매체와 기관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동굴의 벽화로, 도서관의 책으로, 박물관의 유물로. 다양한 양상으로 발달해 온 문화의 저장 방식은 이제 ‘메타버스 공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장소에 우리의 족적을 남기고자 합니다.
인류가 일구어 온 문명과 예술을 ‘문화’의 이름으로 발전시키고 전승해 온 인문학, 그리고 이제 새로운 문화의 저장 매체로서 대두되는 ‘메타버스’. 인문 분야에서의 메타버스 활용이, 앞으로 유형의 기술과 무형의 가치의 상생 시대를 이루어내는 데에 유의미한 발걸음으로 남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작성자: XREAL 강다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