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REAL
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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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캐릭터 너머의 또 다른 나

약방의 감초, 디지털 서비스의 이것

근 10년 동안 유난히 인기가 급증한 단어가 있습니다. 컨텐츠를 만드는 팀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양한 3D 툴을 사용하여 '이것'을 잘 만드는 사람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잘 만들어진 '이것'을 가지고 나선 사람들은 얼굴 한 번 안 비치고도 재능을 만개하며, 서비스들은 유저에게 '이것'을 꾸미고 내세울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으면 자유도가 없다며 평점이 가차 없이 깎여나갑니다. 모델링, 버튜버, 커스터마이징. 이 모든 것들과 관련된 말이자,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의 또 다른 나, 아바타. 오늘 저희는 아바타 개념의 역사를 읽어 현재를 해석하고, 앞으로 XR이 아바타를 어떻게 완성시킬 수 있을지 알아보려 합니다.

또 다른 나에서 아바타가 되는 길

이원록-이육사 / 헤르만 헤세 / 말콤 리틀-말콤 X
아바타의 실제 사례들을 찾아보면, 대부분 어떠한 인물이 또_다른_나another_me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용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또_다른_나들이 아바타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또_다른_나 개념에서 아바타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면, 아바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할 수 있겠죠?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또_다른_나를 생각해보면, '실제 사람이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필명, 별명, 가명이 바로 이러한 사례인데요, 사례로 보자면 이원록은 죄수 번호에서 음을 얻고 항일의 뜻을 담아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활동했고, 헤르만 헤세는 시대의 명작 [데미안]을 주인공 싱클레어의 이름을 빌어 출판했습니다.
단순한 가명 또는 별명이라면 더욱 그 사례가 많습니다. 카르다노에게 3차 방정식의 해를 빼앗긴 수학자로 유명한 타르탈리아, 그의 본명은 니콜로 폰타나입니다. 리틀이라는 백인 스타일의 라스트 네임 대신, 이제는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어딘가에 있을 본인 조상의 성을 의미하고자 한 말콤 X도 있죠. 현대적인 사례를 찾아보자면 예명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연예인들도 전부 그에 해당합니다.
다만 이들 중에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아바타와 가까운 개념을 꼽자면 필명이나 활동명, 그 중에도 헤르만 헤세의 싱클레어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례들은 왜 소거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실제 존재의 의도양립가능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의 의도를 일부러 투영했다

타르탈리아는 이탈리아어로 ‘말을 더듬다’ 그 자체입니다. 즉, 한국식으로는 김어눌 정도 되는 것.
먼저 ‘실제 존재가 또_다른_나를 의도하고 만들었는가?’를 고려했을 때, 타르탈리아와 같은 단순한 별명이 소거됩니다. 타르탈리아는 니콜로 폰타나가 말을 더듬는 습관을 보고 본이닝 아닌 타인들이 붙인 별명이므로, 당연히 본인의 의지로 만들어낸 또 다른 니콜라 폰타나가 아니니까요. 본인이 아바타라 생각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바타라 할 수 있겠습니까. 비슷한 논리로, 여러분들은 대부분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들이 여럿 있으시겠지만, 웬만하면 여러분은 그 별명들을 아바타는 커녕 또_다른_나라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즉, 본인이 본인임을 숨기거나 다른 방식으로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가명, 예명, 필명을 사용하는 경우 외에는 전부 후보에서 소거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끝일까요? 아직 필터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어떠한 실체가 아닌, 텍스트 또는 호칭으로서 존재하는 것들 역시 걸러집니다. 그들은 단지 말 그대로 그렇게 불리는called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데,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그 이유는 두 존재가 이 세상에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도를 담은 다른 존재

유재석의 ‘부캐’들은 각각 XOR의 관계 / 하나의 채팅창에서 양립불가능한 멀티 프로필 / [무한도전 명수는 12살 특집] 정준하
저항 또는 감춤의 의도를 담은 필명
황석영, 마크 트웨인, 조지 오웰
필명은 아니지만 비슷한 의도를 지닌 가명
스탈린, 호치민
단순히 이미지를 위한 활동명
전지현, 랩몬스터, 링고 스타, 그 외 넘쳐 흐르는 아이돌 예명과 랩 네임들
한동안 부캐 혁명이니 뭐니 하면서, 유명인들이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해 본인들의 외연을 확장할 때마다 대박을 치던 시기는 꽤 지났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도 여전히 흥행 중인 부캐들은 있으며, 무명 예능인들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부캐를 파면서 본인의 이름보다 그 새로운 이름이 더 유명해지는 성공을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그들의 의도를 100% 반영하여 그들이 직접 만들어낸 부캐들은, 아바타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들은 분명 주체적으로 본인의 의도를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앞서 이야기한 단순 별명들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 부캐들은 실제 본인 명의로 활동하는 '본캐'와 물질적으로 동일한 존재임은 틀림없습니다. 마미손, 다나카, 류헤이가 한데 모여 남산 팔각정 앞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면, 글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매드클라운, 김경욱, 야바위 라이토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모로 보아도 유산슬을 비롯한 [놀면 뭐하니?] 속 유재석의 부캐들과 유재석이 같은 사람이라는 건 사실입니다.
이런 1인 다역 컨셉트는 아주 유서 깊은 컨텐츠 수명 연장의 수단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의 콩트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오페라, 하다못해 고대 그리스의 원형 극장에서도 1인 다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사를 찾아보아도 1인 다역 컨셉트는 단 한 번도 물질적으로 독립된 적이 없었으며, 전부 하나의 몸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기껏해야 영상 편집 기술이 생겨난 현대에 이르러 모종의 눈속임 기술이 등장했습니다. 즉 그들은 또_다른 _나another_me가 아닌 다른 인격multi-persona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부캐들은 재활용 또는 부활과도 같은 개념으로 사람들에게 활발히 제시되며, 다른 방향으로 재미있는 미학적 논의가 가능한 대상입니다. 하지만 본캐와 부캐의 물질적 양립이 불가능하기에 이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안타깝게도 치환의 개념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몸을 사용하는 한 명이, 아무리 많은 부캐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는 현실에서 하나의 캐릭터만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본인 입장에서는 각각의 캐릭터마다 가치가 높은 캐릭터와 낮은 캐릭터가 있겠지만, 결국 두 캐릭터를 동시에 표현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하나의 몸으로 창출 가능한 가치 그 이상의 가치를 동시에 얻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숱한 부캐들을 아바타의 일종이라 한다면 아바타 개념의 가치는 너무 낮아집니다. 캐릭터나 컨셉트 또는 페르소나라는 단어로 설명 가능한 개념이라면 아바타는 지금처럼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을 수 없습니다. 아바타는 창조 내지는 확장의 개념으로 지금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기에, 다른 개념들 그 이상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제시해봤던 아바타 후보들 중 의도가 없는 것과 물질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을 소거하면, 헤르만 헤세와 싱클레어가 남습니다. 왜 둘의 관계는 특별할까요. 왜 싱클레어는 헤르만 헤세가 만든 아바타라는 말이, 마미손은 매드클라운이 만든 아바타라는 말보다 더 어울릴까요?

양립할 수 있다면 확장된 것이다

텍스트가 작아서 대신 설명하자면,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 말고도 자기 투영 소설을 2개 더 썼다는 말.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에 대한 탐구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소설의 서술자로서 직접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 우리에게 그 과정을 구차하게 설명하죠. 게다가 소설의 전체 제목도 [데미안: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 시절 이야기]이고, 심지어 초판 인쇄본 저자의 이름도 분명 에밀 싱클레어라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듯이, [데미안]의 저자는 헤르만 헤세입니다. 그는 왜 이렇게 본인을 숨기고 필명을 내세웠을까요?
표면적인 이유로는, 헤르만 헤세가 본인의 이름값을 배제한 객관적 평가를 원해서라고 직접 밝혔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다른 저술 활동을 보면 꼭 그 오만한 겸손이 그가 싱클레어를 작가로 내세운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정작 그의 다른 작품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골드문트,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르를 지켜보자면, 똑같이 헤르만 헤세 본인의 인생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죠. 특히 이번에 자료 조사를 더 진행하다 보니 다시 한 번 느낀 것인데, 정말 헤르만 헤세만큼 본인 이야기로 작품 리스트를 채운 사람이 또 없습니다.
학문적인 단어로 쓰자면 이것이 바로 작가의 자기 투영입니다. 박태원이 쓴 [소설가 구보 씨의 一日]이나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 한국 근현대 문학가들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많이 발견하셨을 테고, 최근의 사례를 보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자기 투영으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즉, 헤르만 헤세를 비롯한 자전적인 서사의 작가들은 본인이 지금까지 걸어온 과거를 되짚어 해체하고 분석하며 본인의 자아의 모습을 새롭게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자아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존재합니다. 부캐마냥 본인이 변장하거나 본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장난이 아니고, 본인이 만들어낸 또 다른 실체 있는 존재로서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미디어의 한 형태로 말이죠. 자기 투영된 미디어는 명백한 ‘나의 창조적 확장’입니다.
본인이 연기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멀티 페르소나와는 다르게, 헤세-싱클레어, 하야오-마히토의 관계가 나-또_다른_나me-another_me 관계로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싱클레어는 작품의 주인공임과 동시에 헤르만 헤세가 상상하고·구체화하여·적고·쓰며·이름지은, 헤르만 헤세와 독립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투영된 미디어의 물질적 독립이란 그 객체가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원본(사람)과 원본의 복제(미디어)가 같은 시간에 양립할 수 있기만 한다면, 그 또한 물질적 독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헤르만의 스펠링은 ‘Hermann’입니다. 그런데 이미지 수정을 하지 않고 캡션에 설명을 붙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이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원본(사람)의 죽음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데미안]이 엄청난 인기를 끌어 작가 '에밀 싱클레어’가 여러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받고 유럽 문단 모두가 그의 정체를 궁금해 하던 1919년, 갑자기 헤르만 헤세가 소리 소문 없이 세계에서 사라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달 전, 유명 작가 헤르만 헤세의 실종이 저희 일간지에 처음, 특보로 실렸습니다. 그의 실종 사건에 대하여 아직도 다양한 음모론이 유럽을 나돌고 있습니다. 몇몇 이들은 ‘이제는 헤르만 헤세를 기억해야 할 때’라며 추모를 시작했고,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 이전까지 집필한 작품들은 문학계에서 슬슬 그의 유작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 . . 한편, 신예 작가 싱클레어가 발표한 작품 [데미안]이 이번에도 스페인작가협회상을 수상했습니다. 작가의 자서전 형식을 띄고 있는 이 작품은 인간 심리의 선악 구조과 존재 의식에 대한 놀라운 작품으로 평가 받으며 유럽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 싱클레어는 숱한 수상에도 불구하고 두문불출하여 오히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그의 인생 이야기는 전 유럽을 놀라게 했지만, 그는 여전히 얼굴 없는 작가로 남아 있습니다 . . .
실제로 당시 [데미안]은 여러 가지 상을 받았는데, 작가의 정체를 모르던 시상 주체들이 부른 수상자의 이름은 헤르만 헤세가 아닌 싱클레어였습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당황한 헤르만 헤세는 머지않아 직접 본인이 싱클레어라는 이름을 내세웠음을 밝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제 [데미안] 사본을 찾아보면 대부분 작가가 헤르만 헤세라 밝혀져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에 와서 보면 싱클레어는 헤르만 헤세가 쓴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작가의 자기 투영 캐릭터에 불과하며, 그렇기에 정작 싱클레어를 헤르만 헤세의 아바타라 부르기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싱클레어의 서사에서 우리는 아바타의 숨겨진 조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이미 완성된 아바타의 정의에 추가되는 조건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아바타가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마지막 사항은 타인들이 나와 아바타의 관계를 알고 있는가입니다.

독립성을 위해 숨겨야 하는 관계

잠시 과거로 돌아가봅시다. 단어 /아바타/의 사회적 보급을 이룬 일등 공신은 제임스 카메론입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특정 장비를 활용하여 푸른색 외계인과 유사한 인공 신체인 ‘아바타’에 접속 내지는 탑승을 했고,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사실 지금의 아바타 개념을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현지 나비족들은 아바타에 접속한 제이크 설리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제이크의 푸른 몸을 침략자 인간들과 관여 되지 않은 독립된 동족으로 알고 있었죠. 그러나 그 정체를 알게 된 이후 그들만의 제이크를 받아들였습니다. ‘제이크와 그의 아바타’라는 두 가지 존재 중, 그들만의 기술(영혼의 나무)을 통해 하나의 존재를 부정한 뒤, 다른 하나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방법으로.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나비족이 인간 제이크 설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제이크의 아바타는 나비족의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화살을 맞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바타가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타인들이 아바타와 원본의 관계를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 둘의 관계가 공개되면 아바타의 행동이나 결정이 원본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독립성이 훼손되는 것이죠. 면접을 진행할 때 가족 관계 등을 언급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는 것처럼, 타인들이 아바타와 상호작용할 때 원본에 의한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면 그 아바타는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인도 경전 [마하바라타]에 ‘아바뜨르’가 나온다. 흔히 말하는 ‘어센션’과 같은 방식이지만 주체와 방향이 다르다고나 할까?
실제로 /avatar/의 어원을 찾아보면 그 주제의식은 더욱 강해집니다. 아바타의 어원은 인도 산스크리트어의 /avatara[아바뜨르]/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요, 원래의 의미는 굉장히 종교적인 단어로 인도 신화의 브라흐마·비슈누·시바와 같은 절대적인 존재들이 세상에 현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강림 또는 우상에 대한 타 종교들의 이야기와도 비슷하면서 다른 점이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avatara/들은 신의 화신이지만 각자 독립적인 인격과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라마와 크리슈나는 비슈누의 아바타로서 자신만의 역할과 사명을 수행합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성한 정체를 숨기고 일반인처럼 생활하는데, 이는 그들의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되는 불필요한 주목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아바타들은 세상에 혼란이 있거나 악이 번성할 때 등장하여 균형을 회복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특정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형태로서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처럼 아바타의 어원에서부터 원본과 아바타의 관계를 비밀로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신들의 아바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세상에 필요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일개 인간에 불과한 우리들도 결국 목적을 가진 채 아바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전략적으로 본인의 정체를 드러낸 채 아바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부캐라 부릅니다.

중간 정리: 아바타의 엄밀한 정의

이제 마지막으로 정리해봅시다. 별명도 아니고, 부캐도 아니며, 온전하게 작동하는 아바타 개념이란,
원본으로서 한 인간이 존재한다
원본이 의도를 담아 아바타를 만들었다
그 아바타는 원본과 독립적인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 둘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 아바타를 누가 조종하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 둘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타인들과 다른 상호작용을 이룬다
그러나 이 개념을 현실에서 구현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어떠한 피조물이 이를 모두 만족하기란 너무 어렵죠. 한동안 실제로 아바타를 만들어 운영했다고 볼 수 있는 헤르만 헤세처럼 얼굴 없는 형태의 미디어 제작자와 같은 형태를 채택하지 않는 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비슈누처럼 또는 야훼처럼 쉽게 아바타를 내려보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바타 개념의 조건을 전부 충족하는 사례가 없지는 않습니다. 바로 펭수와 스포츠 구단 마스코트들과 같은 인형탈인데요, 인형탈을 조종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의도를 담아 사람들 앞에서 행동하며, 인형탈로 표현된 마스코트는 원본인 인간과 분명 독립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인형탈 속 인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따금 인형탈의 열기에 지친 사람이 잠시 쉬고 있다가 발견되면, 사람들은 ‘내장을 봐버렸다’며 충격에 빠집니다. 또한 인형탈을 착용한 이들은 결국 특정 이익집단의 의향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대다수이기에, 원본과 아바타의 독립성에 대해서도 메워지지 않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실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해결책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생겼다고 봐야겠죠.
원본으로서 한 인간이 아바타를 장치로 조종한다
원본이 아바타를 의도를 담아 버튼을 눌러 생성했다
그 아바타는 현실 공간이 아닌 화면 속 공간에 존재하며
사람들은 아바타를 조종하는 실제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그 둘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타인들과 다른 상호작용을 이룬다
바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가상 이미지 아바타입니다.

이유 있는 디지털 아바타 유행

아바타 개념은 자아의 확장 측면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아주 다양하고 철저한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실 세계와 비교했을 때, 가상 세계의 가장 큰 장점은 ‘투입하는 자원에 비해 시각적으로 더 효율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아바타 개념은 가상 세계를 만나 꽃을 피울 수 있었고 지금도 한창 피어나고 있습니다. 초창기 SNS라 볼 수 있는 싸이월드의 ‘미니미’부터 온라인 게임의 화려한 캐릭터까지, 기술이 발전하며 가상 이미지 아바타는 꾸준히 이상적인 조건을 충족해 가고 있습니다. 그 중, 아무래도 현재 가장 아바타와 가까운 존재는 단연코 버튜버버츄얼 휴먼입니다.
스트리머 우왁굳의 프로듀싱으로 만들어진 ‘이세계아이돌’을 비롯하여, 사실상 서브컬쳐 내지는 오타쿠 문화로 인식되었던 한국의 버튜버 시장은 최근 급속도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2D 혹은 3D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실시간 스트리밍을 하며 게임, 토크쇼, 노래 등을 콘텐츠로 제공합니다. 초기에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문화와 기술 발전이 결합되면서 특히 일본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국내에서는 최근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버튜버들은 유튜버와 비슷하게 후원, 스폰서십, 굿즈 판매 등으로 수익을 창출합니다. 단지 다른 것은 스트리밍 화면 우하단에 실제 사람 대신 다른 이미지가 위치한 것이죠.
한편 인플루언서 또는 가수 활동을 하는 버츄얼 휴먼의 경우에는 버튜버보다 더 정돈된, 더 큰 규모의 사업으로 성장한 모습입니다. 초창기 버츄얼 휴먼 유행을 선도했던 로지는 지금은 한 풀 꺾였지만 부산 엑스포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하고 있으며, 플레이브•아포키•나이비스 등 인간 가수와 유사한 수준의 활동을 하며 화제성을 챙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유명인들의 과거 행적 논란에 대한 리스크가 버츄얼 휴먼에서는 없다시피 하다는 리스크 관리 차원의 접근 등이 있죠.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들을 가장 이상적인 아바타 개념에 가까운 미디어라 주창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 아바타 개념의 최전선에 위치한 이들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지위를 얻었는지 알아보며, 그들을 중심으로 최신 아바타 개념이 사회에서 과거보다 더욱 주요해진 요인을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먹을거리가 늘어난 가상 세계

2010년대 즈음부터 가상 세계의 가치가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물론 20세기 말부터 꾸준히 디지털 환경에서의 상호작용과 가상 자산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다양한 플랫폼과 기술들이 발전했죠. 그러나 과거에는 기껏해야 예쁘고 멋있는 데이터 쪼가리로 인식되던 가상 아이템들이, 점차 현실에서도 만지기 어려운 거금으로 거래되면서 슬슬 가상 세계의 경제적 가치의 폭증이 시작된 것입니다. 유명한 사례로는 2011년 당시 현금 1억 2,500만 원으로 거래된 리니지의 진명황의 집행검이 있으며, 해외에서도 몇몇 유명 RPG 게임의 희귀 아이템들은 수백 수천 달러를 호가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가상 세계의 자본 투입은 NFT 열풍과 가상화폐 시장의 대호황으로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심지어 현실에서의 자본 유동성을 얼려버린 코로나가 겹치며, 가상 자산에 대한 관심과 자본의 흐름은 배가 되었죠. 이런 흐름 속에서 버튜버와 버츄얼 휴먼은 이전과 달리 대중과 더욱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고, 곧이어 특색 있는 프로덕션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순수하게 생각해보면 일종의 낙수효과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으며, 어쩌면 NFT 버블을 지켜보며 말 그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가 경우에 따라 억만금이 될 수 있다는 큰 충격을 받은 사회가 그보다 가상성이 덜한 두 개념에 자연스레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불쾌한 골짜기를 피할 수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유튜버뿐만 아니라 기존 유튜버들도 버튜버로 활동하기 위해 캐릭터를 만들거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매우 쉬워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 버튜버의 총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죠. 그리고 이 현상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사람이 아닌 동물을 묘사한 캐릭터 또는 2D 애니메이션 등장인물 기반의 캐릭터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최고의 3D 그래픽이 각진 폴리곤 덩어리였던 시절을 지나, 점차 그래픽 수준이 높아지며 현실에 가까운 환상에 대한 수요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카메론의 [아바타] 이전에도 여러 번의 3D 애니메이션 혁명이 일어났고, 그 중 유명한 것은 로버트 저메키스의 [폴라 익스프레스]. 다만 이 작품은 다른 의미로 유명했습니다. 불쾌한 골짜기 속 등장인물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애매하게 잘 만든 목각인형처럼 보였고, 눈에는 영혼이 없었습니다. 사이버 가수 등 예전부터 버튜버와 버츄얼 휴먼에 비견되는 시도가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사장된 것은 당시 경제적 효율과 함께 불쾌한 골짜기 이슈가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아바타를 위한 전략은 다양하게 발전했고, 크게 두 가지 분야로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버튜버들이 다수 사용하는 라이브 2D 기술입니다. 이들은 마치 만화에서 보던 비현실적인 형태의 인간 그림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실제 사람보다 더욱 과장된 비율의 데포르메지만, 보편적으로 미형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2D 애니메이션•서브컬쳐 그래픽은 마니아를 넘어 오타쿠를 양산, 버튜버들에게 확실한 콘크리트 시청층을 보장해주기도 합니다. 한편 모션 트래킹 기술 발전 역시 버튜버의 양산을 가능케 했습니다. 실제 사람처럼 끊김 없는 수준에 다다르지는 않았으나, 실시간으로 버튜버가 아바타의 모습으로 방송을 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는 지금입니다.
한편 버츄얼 휴먼의 경우에는 더욱 현실과 유사해지기 위해 피를 깎는 노력, 정확히는 돈을 쏟아붓는 노력을 들여 최근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대부분 상체만을 구현해도 되는 버튜버의 모션 트래킹과 달리 온몸의 움직임을 담아내려 노력하는 전신 모션 트래킹 기술은 물론, 끊임없는 그래픽 혁명을 통해 더욱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미형의 외모를 가능케 하고 있죠. 특히 나이비스는 SM 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 자본 하에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지난 10일 데뷔하였습니다. 작년 초 공개된 불완전한 이미지와 비교했을 때, 데뷔 이후의 이미지에서 불쾌한 골짜기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그 세계관처럼 리얼 월드에 진입했다는 그래픽적 상징성 하나는 확실하게 챙겼습니다.

개성이 넘치는 사회, 가상이 넘치는 세상

아바타 개념과 커스터마이징 개념은 버튜버 및 버츄얼 휴먼에서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아바타를 통해 본인의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이를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의 특징을 돋보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특성은 퍼스널 브랜딩과 개인 사업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터넷 방송인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화상 통화 및 업무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서비스 ZOOM은 자체 아바타 기능을 지원하고 있으며, 메타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에서는 미모지가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각 세대가 각자 아바타 개념에 익숙하다는 것 또한 주요하게 작용합니다.
2000년대에는 자신만의 '미니미' 아바타를 만들고 꾸밀 수 있었던 싸이월드가 대흥행했으며, 이러한 초기 경험은 현재 3040 연령층의 디지털 공간에서의 자기 표현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한편 2030 연령층은 아바타에 비견되는 가상 캐릭터를 적극 활용하는 만화•게임 등의 매체를 유년기부터 비교적 쉽게 즐길 수 있었기에, 아바타 개념에 대한 우호도는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1020 세대는 가상 시장의 가치가 대폭 상승하던 시기에 태어나, 청소년기에 이미 비트코인과 NFT가 수억을 호가하는 시기를 보고 프로게이머들과 버튜버들이 튼튼한 수요층을 바탕으로 재능을 만개하며 사회적/경제적 성공을 이루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바타 개념을 엄밀하게 검증하지 않아도 경험으로 체득한 세대가 이제 사회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신기술을 아바타 개념 구현에 적극 적용하는 수순에 이르렀기에, 아바타 개념이 지금처럼 보급된 것입니다.

그리고 메타버스… 일까?

그런 흐름의 종착점은 결국 메타버스였습니다.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코로나 위기를 기회로 삼아 대유행하며 아바타라는 단어 역시 차원이 다르게 많이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바타는 단순한 그래픽 캐릭터 처지를 넘어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미디어의 한 형태로 부상했습니다. 다양한 플랫폼에서 사용자들은 아바타를 커스터마이징하여 독특한 디지털 분신을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경험과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메타버스의 성장과 함께 아바타의 중요성과 활용도는 더욱 확대…
되고 있을까요? 정말… 그럴까요?

가짜 아바타와 나쁜 아바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아바타의 엄밀한 정의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바타는 사람의 의도를 담을  있는 사람과 독립된 존재이며타인들은 원본인 사람과 복제인 아바타의 관계를   없다\begin{aligned} \sf\bold{아바타는~사람의~의도를~담을~수~있는~사람과~독립된~존재이며} \\ \sf\bold{타인들은~원본인~사람과~복제인~아바타의~관계를~알~수~없다} \end{aligned}
이와 같은 한 단계 위의 조건들이 성립하기 때문에, 아바타는 단순한 별명과 필명, 부캐 컨셉, 게임 캐릭터 그 이상의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에, 아마 여러분들은 지금 당황하셨을 텐데요, 바로 게임 캐릭터와 아바타의 차이입니다. 이어서 여러분이 확인하실 수 있는 것은, 게임 캐릭터와 아바타가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대답이며, 지금 메타버스를 자처하는 것들이 왜 게임 캐릭터를 아바타라고 주장하는가에 대한 폭로입니다.

커스터마이징과 프리셋: 선택이라는 착각

온라인 게임이 아닌 싱글 게임들은 대부분 잘 뽑힌 하나의 캐릭터를 제공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굳이 그 캐릭터들의 외형을 교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그러한 몇몇 수요는 유저들의 비공식적인 모딩으로 충족되는 실정입니다. 다만 온라인 게임에서 캐릭터의 외형의 가치는 다르게 책정됩니다. 남들이 보는 내 캐릭터의 모습, 이는 유저들의 게임 캐릭터를 더욱 예쁘고 멋있게, 또는 독특하게 꾸미고자 하는 욕구를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발전된 기능이 바로 커스터마이징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심즈]와 [인조이] 같은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과 [로스트아크]와 같은 대규모 온라인 게임이 그 사례입니다. 엄청나게 방대하고 디테일한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지원하여, 유저들이 본격적으로 본인의 이상향에 걸맞은 캐릭터들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어도 [엘든 링]과 같은 선택적 온라인 게임과 [사이버펑크 2077]과 같은 싱글 게임에서도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지원하여 눈길을 끌곤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임사들이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제공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커스터마이징을 가능케 하려면, 그만한 개발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게임사들은 이전부터 프리셋을 준비했습니다. 게임사들이 직접 아이템을 제작하고 커스터마이징 수치를 입력한 뒤, 그 커스터마이징 결과를 번들화 및 상품화 하여 제공 및 판매를 하는 구조인데요, 사실 이것은 앞의 시스템과는 달리 유저들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유저들은 본인의 이상향에 충족되지 않는 수준의 프리셋이더라도,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의 만족감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에 프리셋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것이 현재 게임 캐릭터의 기본값이라 할 수 있으며, 유저들은 게임사의 효율적인 선택으로 이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메타버스를 표방한 온라인 서비스가 이와 같은 프리셋 기능에 머물러 있다는 점입니다.
분명 프리셋 기능은 디테일한 커스터마이징 기능의 하위호환입니다. 유저들은 준비된 코스튬 및 외형 수치를 선택하면서 본인의 캐릭터를 마치 아바타처럼 꾸미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사실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게임사들은 최대한 더 아름답고 유저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프리셋을 출시, 이른바 코디템으로도 판매하며 수익화를 하기도 하죠. 그리고 이것은 현재 메타버스를 표방한 서비스들이 빠짐없이 채택한 체계입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 메타버스로서 유저들에게 아바타를 제공하고 싶다면, 앞서 언급된 최고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지원하거나, 그와 같은 기능을 제공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아바타 개념을 채택하는 것을 미뤄야 합니다. 외형 선택의 자유를 유의미하게 제공하지 못한다면, 유저의 의도를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들은 자랑스럽게 아이템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인-게임 재화는 물론 현금으로도 말이죠. 이것은 메타버스라면 부끄러워 해야 할 일입니다. 게임과 차별화하기 위한 커스터마이징이라는 특징을 스스로 포기한 것. 심지어 한국형 심즈라 불리며 엄청난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지원하는 [인조이]는 스스로 본인들은 게임이며 메타버스가 아니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죠.
따라서 현재 가짜 메타버스 이용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캐릭터들은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활용한 외형 선택의 자유 측면에서 아바타가 아닙니다. 그들은 게임 캐릭터입니다. 당연히 게임 캐릭터라는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그들이 메타버스를 표방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의 문제입니다.

의도의 손실: 반드시 정해진 목적

게임은 보통 사전에 정해진 규칙과 제한된 환경 속에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게임을 하는 사용자는 캐릭터를 자유롭게 조종한다고 느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게임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선택의 자유에 대한 착각과 유사하지만, 조금 더 논의할 점이 남아 있습니다. 분명 게임은 성취 및 경쟁이라는 주 흥미 요소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특정 목표치를 넘어서는 것 등 정해진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러 가지 요소들을 전체적인 과정으로 형성, 개개인의 다양한 목표 지향을 가능케 하는 RPG 장르가 있기 때문이죠.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왜곡되기 전에도, 몇몇 게이머들은 메타버스에 대한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곤 했습니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같이 뛰어놀고 다양한 게임을 즐기며 그 속의 경제 체계가 있는 모습이, 사실 예전부터 존재했던 RPG 게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이었죠. 분명 그와 같은 모습은 RPG와 시스템 상으로 크게 다를 바는 없습니다. 실제로 RPG는 다양한 측면에서 메타버스와 유사하며, 저희의 이전 아티클 “메타버스는 왜 유행했을까?”에서 탐구했던 것처럼 메타버스를 RPG의 다음 단계로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에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충실하게 구현하는 게임들 중 대다수가 RPG 게임 또는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그들의 캐릭터는 분명 아바타에 근접해 있으며 일부 측면에서는 아바타로 간주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정작 메타버스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RPG 요소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미니게임으로 컨텐츠의 대부분을 채워 넣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미니게임 속 캐릭터들은 본인이 원하는 행동을 하거나 본인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기보다는, 주어지는 컨텐츠를 즐기며 단순한 유희를 이어가기 마련입니다. 당장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그 인기에 비해 놀랍게도 본인들의 아바타를 찍어 올린 유저들이 한없이 적습니다. 심지어 틱톡과 같은 숏폼 플랫폼에서도, 게임을 하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다수 확인할 수 있지만 아바타 자체가 컨텐츠가 되는 경우는 보기 힘듭니다. 굳이 엄밀한 정의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당연히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아바타의 기본 덕목이 무색하게 그들이 제공하고 있는 캐릭터는 자기 표현 측면에서 과거 특정 인물의 대표 이미지로서 활용되던 싸이월드의 미니미보다도 못한 처지인 것이죠.

원본을 따라오지 못하는 캐릭터

게임을 할 때 우리는 키보드, 마우스, 터치스크린 등의 입력 장치를 통해 캐릭터의 모든 행동을 제어합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 장치의 사용법을 배워, 캐릭터를 조종할 때 사용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역시 원본의 의도를 반영하는지에 대한 여부. 다만 게임 캐릭터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게임에서의 성취를 위한 행위를 주로 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말인즉, 그 외의 행동을 하는 건 찾아보기 힘들며, 그러한 경우에는 결국 개발자들이 그것을 따로 준비해 두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실 게임 캐릭터와 아바타를 물리적인 측면에서 분리하는, 자유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타 오픈 월드 게임을 논할 때 자주 사용되는 자유도 개념은 정확한 지표와 명확한 장점이 있다고 보기 힘들어 논란이 많은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 자유도를 유저가 사용하는 캐릭터 하나에 적용한다면 지표와 장점은 명확해집니다. 그 누구도 현실에서 선택의 자유와 행위의 자유 그리고 이동의 자유를 마다할 필요가 없듯이, 우리가 조종하는 가상의 캐릭터 또한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될수록 더 많은 권리를 얻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키보드와 마우스, 터치스크린 등으로 조종할 수 있는 캐릭터들은 전부 아바타의 조건인, 원본의 의도를 반영해야 함을 온전히 충족할 수 없습니다. 당장에 인도 신화의 브라흐마와 비슈누가 저들만의 키보드나 닌텐도 스위치로 아바타를 조종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시나요? 또한 본인이 아바타를 직접 하나하나 제어해주는 동안 오히려 원본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역으로 아바타에 의해 원본의 독립성이 침해받는 경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아바타 제어 측면에서는 현재 보급된 모든 입력장치들이 이상적인 상태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메타버스를 주장하는 이들의 터치스크린 조이스틱 UI 입력 방식은 더욱 반-아바타적일 뿐이죠.

SNS는 오히려 아바타가 아니다

심지어는 현재 그들의 서비스 운용 방향마저도 아바타 개념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3D 공간 SNS로 서비스 운영 기조를 잡고 있기 때문이죠. 하여 어쩌면 그들은 메타버스를 일종의 소셜 서비스로 간주 및 왜곡하여 지속가능한 서비스 공급을 꾀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오히려 그들의 캐릭터는 독립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미 아는 사람들이 캐릭터를 통해 만나는 일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죠.
이 캐릭터가 누구의 캐릭터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그 캐릭터의 뒤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마련. 이는 아무리 그 상대방이 친한 친구더라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친한 친구와 같이 게임을 할 때 쓸 데 없이 방해하고 장난을 치느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과 게임을 할 때 게임에 집중해 좋은 결과를 내는 경우도 있죠. 이는 대부분이 결국 본인의 재미와 성취감을 위한 게임이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회로서 작동해야 하는 메타버스에서는 배격해야 하는 일.
그렇기에 메타버스는 SNS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싸이월드의 미니미가 훌륭한 프로필 사진 역할을 했지만 본인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았고, 정작 담벼락에 본인의 실제 얼굴 - 물론 보정된 - 을 대놓고 올려놓는 경우도 많았죠. 인스타그램의 미모지 또한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 역시 결국 인스타그램의 실명성보다 약한 맥락을 보여줍니다. 당연히 메타버스를 자처하는 3D 공간 SNS들의 캐릭터들도, 그 뒤의 지인과 친구들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이상 아바타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아바타 개념의 오용은 업보를 쌓는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용자의 의도를 불완전하게 반영한다
외형 선택의 측면에서
행위와 이동의 자유 측면에서
사용자와 아바타의 관계가 독립적이지 않다
특정 장치를 이용한 불완전한 제어
SNS식 운영으로 인한 사용자 정체 인식
물론 대부분의 게임 캐릭터들이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유저들 입장에서는 이 게임 캐릭터들도 충분히 아바타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유저들의 기대치 또는 그 캐릭터들에게 원하는 기능이 따로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개념적으로 게임 캐릭터와 아바타는 분명히 구별해야 하지만, 사용자는 아바타와 게임 캐릭터를 혼용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제작자들이 게임 캐릭터를 아바타로 속일 때. 모르는 채로 그랬다면 무능한 것이고, 아는 채로 그랬다면 그것은 업보가 될 것입니다. 추후 유저들은 아바타의 잠재력을 모를 것이며, 놀라운 기능에 시큰둥할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를 팔아 지금의 잘못된 시스템을 유지하는 중입니다.

XR과 AI로 완성할 아바타 개념

마지막 챕터에서, 아바타 개념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미래를 완성할 수 있는 기술인, XR과 AI에 대해서 말이죠. 물론 XR 기술과 AI 기술이 아바타 개념을 완성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엄청난 자본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비슈누와 브라흐마 그리고 시바, 3명 혹은 3개의 신만이 인도 땅에 아바타를 내려보낼 수 있었던 것처럼 막강한 권력과 충분한 자본을 갖춘 이들만이 이상적인 수준의 아바타를 운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요가 있다면 언제까지고 기술의 발전은 이어지기 마련이며, 이는 동시에 언젠가는 반드시 보급이 된다는 뜻입니다.

의도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법

첫 번째는 XR 시장에서 무섭게 발전 중인 모션 트래킹 기술입니다. 버튜버 및 버츄얼 휴먼 시장에서도 모션 트래킹은 프로덕션 과정에서 요긴한 기능이지만, XR에서는 어쩌면 그보다 더욱 강력하고 간절하게 원할지도 모릅니다. 버튜버의 트래킹 오류는 밈으로 비화되기도 하며, 버츄얼 휴먼 가수들의 오류는 일종의 덕질 모먼트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움직임 자체 슬랩스틱 차원의 재미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 이미지 뒤의 진짜 사람에 대한 흥미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XR 컨텐츠에서의 모션 트래킹 오류는 쌍방향입니다. XR 컨텐츠를 사용하는 본인도 트래킹의 대상이며, 상대방도 트래킹의 대상. 가만히 앉아 관람의 대상이 되는 앞의 사례와는 달리 XR 컨텐츠에서의 트래킹 오류는 명백한 오차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는 컨텐츠의 진행 자체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온 의도의 손실을 야기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XR 시장은 모션 트래킹 기술에 큰 투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바타는 사용자의 의도를 온전하게 따르는 만큼 더 큰 가치를 갖기에, XR의 모션 트래킹 기술은 아바타 개념을 더욱 완전하게 할 것입니다.

인간의 몸부터 온전히 따라하기

컨트롤러나 핸드 트래킹, HMD를 활용한 컨트롤 방식이 키보드와 마우스, 터치스크린과 같은 컨트롤 방식보다 좋은 것은 직관입니다. 물론 이미 후자에 익숙한 우리는 오히려 전자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아바타 사용의 측면에서는 분명 전자가 후자보다 유리합니다. 그 이유는, 결국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아바타를 조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수많은 게임 캐릭터와 아바타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버튜버의 캐릭터들을 보면, 인간형 내지는 인간의 신체 구조와 호환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하다못해 눈과 입만 움직이는 캐릭터들이더라도 그 눈과 입의 움직임은 실제 눈과 입을 트래킹한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죠. 따라서 아바타 기능은 실제 인간의 몸의 정보를 더 많이 반영할 수 있을수록 완벽할 것입니다. 그 이후 취사선택하고 가공하여,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아바타에 투영하면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컨트롤 방식으로서의 XR은, 인간의 몸으로 아바타를 물리적으로 조종하는 최고의 방식입니다. 다만 그 외에 더욱 현실적이고 ‘아바타스러운’ 해결책 또한 있습니다. 바로 AI를 이용하는 것.

XR•AI 융합으로 가능한 분신 그 자체

아바타가 최고의 효과를 낸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무엇보다 자아의 확장이 필요합니다. 아바타가 인간의 몸을 제대로 따라하지도 못하는 지금, 인간의 몸부터 온전히 반영하는 기능이 물론 필요하지만, 결국 인간이 시간을 들여 아바타를 조종해야 한다는 점에서 원본과 아바타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XR과 AI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우선 XR은 시각적으로 아바타와 원본을 분리하는 역할. 신화 속 아바타를 생각해보면 그들은 인간의 눈에 보이고 인간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니터와 같이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매체 속의 미디어 형태로는 아바타는 현실의 상대방과 상호작용을 하는 데에 많은 부족함이 생기기 마련, 이는 버튜버 등 현재 아바타에 가장 가까운 존재들마저도 효율 측면에서 비판받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XR 환경에 접속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특히 상대방이 AR 환경에 접속, 원본이 되는 인간이 해당 AR 환경에 아바타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원과 이상향에 가까운 아바타의 형태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는 수많은 SF 영화에 등장하고, 지금 XR과 독립적으로 발전 중인 홀로그램 기술과 궤를 같이합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사용자와 아바타의 독립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바타가 사용자의 명령 및 생활 패턴을 학습한 AI를 바탕으로 작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경우, 원본은 아바타 조종을 위해 특정 장치는 물론 어떤 시공간에 귀속될 필요 없이, 아바타를 원하는 곳에 풀어두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 실제 /아바타라/가 보여주는 모습. 원본으로서의 인간은 그대로 존재하며, 그의 아바타는 원본과 특질이 겹칠지언정 물리적으로 그리고 활동적으로 실제 인간과 겹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아바타로 간주되지 않는 GPT 마저도 개인 비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우리 스스로 모르고 있는 우리 머릿속 이야기를 구체화해주는데, 아바타로 비화된 AI의 미래는 더욱이 기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메타버스에서 갖춰지는 아바타 철학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온전한 메타버스의 도래입니다. 메타버스의 엄밀한 정의 또한, 현실 세계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현실 세계의 확장 가상 공간이기 때문이죠. 그 속의 존재에 관여하는, 원본으로서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분명 아바타의 엄밀한 정의에 매우 가까울 것입니다. 또한 메타버스가 아니지만 메타버스를 마케팅 용어로 사용하는 이들이, 마치 노린 것처럼 아바타 단어마저 오남용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 연관성은 이미 입증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결론: 미래를 위한 현재의 교정

지금까지 아바타 개념의 엄밀한 정의에 대한 사례 탐구에 이어, 현대 아바타 개념의 유행에 대한 분석, 그리고 미래 아바타 개념의 완성을 위한 XR과 AI 측면에서의 접근을 이어 왔습니다. 물론 이렇게 엄밀한 정의를 내리지 않더라도 아바타 개념에 대한 논의는 가능하며, 현재 시장에서 사용되는 아바타 개념에 안주하여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바타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아보며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아바타의 잠재력 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아바타 개념이 분명히 오용되고 왜곡되는 부분이 있기에, 이러한 상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결국 오늘 이 비틀어진 항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10년 뒤 20년 뒤 아바타 개념은 잠재력을 잃고 그저 캐릭터의 유의어, 또는 영화 [아바타 시리즈]의 이름으로밖에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원 /avatara/에서부터 이어지는, 캐릭터라는 단어 그 이상의 의미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변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기술 발전의 연속성을,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공공선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기술이 특정 기업과 서비스의 입맛에 맞춘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개발자와 사용자 모두 해당 기술 개념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 아바타부터 메타버스, NFT 등, 가상 세계의 가치 폭증으로 인해 오염된 수많은 가상 공간 개념의 수복을 간절히 호소하며, 한 인용구와 함께 이번 아티클을 마치겠습니다.
If you tell a lie big enough and keep repeating it, people will eventually believe it. 만약 당신이 충분히 큰 거짓말을 계속 반복한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 요제프 괴벨스, 나치 독일 히틀러의 심복이자 정치인, 그리고 선전선동가 그리고 이것마저도 괴벨스의 말로 잘못 알려진 거짓말입니다.
[작성자: XREAL 신택성]